2003. 06.  『인문콘텐츠』 창간호


인문 콘텐츠를 위한 정보학 연구 추진 방향


김   현*1)


1. 인문 콘텐츠: 무엇을 할 것인가?

2. 인문 콘텐츠와 정보 시스템

3. 지식 정보 유통의 두 가지 길

4. 문화 콘텐츠 vs 인문 콘텐츠

5. 우리나라 콘텐츠 육성 사업의 편향성

6. 비영리적 e-R&D 환경 구축의 필요성

7. 맺음말: 인문정보학 연구를 위한 제언


  1. 인문 콘텐츠: 무엇을 할 것인가?


  정보 기술 및 콘텐츠 사업의 비약적인 성장과 더불어 인문계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인문학적 지식을 정보 시스템과 접목하는 데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인문학 연구자들 사이의 이러한 동향은 최근 인문콘텐츠학회와 같은 연구 조직의 출범을 통해 단순한 관심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실천 방향을 모색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 시점에서 인문계 연구자들이 “인문 콘텐츠”의 육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목표 설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 콘텐츠”는 아직도 그 함의에 대한 사회적 콘센서스가 정립되지 않은 시험적 선도 영역이다. 미정립 상태이기 때문에 그만큼 다양한 방향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안고 있고, 그 점에서 “인문 콘텐츠”의 목표를 미리부터 협소하게 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 분야의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 중에는 직접적으로 문화 산업적 활동과 연대할 수 있는 지식 상품의 개발에 관심을 두는 이도 있을 것이며, 전통적인 인문학의 연구 내용과 방법을 중시하면서 그 연구 또는 교육 활동의 결과들이 지식 콘텐츠 개발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그 필요성과 유효성을 인정할 수 있기에 개방적인 자세로 상호 협력하고 장려해야 할 과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아울러 필자가 “인문 콘텐츠”를 위한 연구 활동의 일환으로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보 과학적 기술 요소를 인문 지식에 도입하기 위한 기술 연구 활동-인문정보학에 대한 연구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인문학과 정보학의 학제적 교섭의 필요성과 추진 방향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2.인문 콘텐츠와 정보 시스템


  콘텐트(Content)는 미디어(Media) 또는 플렛폼(Platform)에 담기는 “내용물”의 의미로서 매체와 결합하여 지식 정보 유통의 전체적인 체계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 개념이기보다 정보 유통 체계의 한 요소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편 근년의 한국 사회에서 “콘텐츠”로 명명되는 대상은 영화, 음악, 애니매이션, 게임, 케릭터, 그밖의 각종 정보 자료나 도서 저작물 등 사람들에게 보고, 듣고, 읽혀지는 모든 자원들이 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인간들이 지적 정서적으로 향유하는 모든 종류의 무형 자산을 포괄적으로 지목하는 이름이 “콘텐츠”인 것이다.2)

  용어의 정의가 어떠하든 간에 그것이 지목하는 대상은 그 용어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지식․문화 자원들이다. 그러한 기존의 자원들을 오늘날에 와서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지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디지털 정보 기술에 의한 미디어의 혁신을 떼 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콘텐츠라고 부르는 무형의 자원들은 예전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그것을 굳이 콘텐츠라고 이름할 때에는 그것이 제작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거나 유통 과정에서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한다는 의미를 더하게 된다. 디지털 정보 형태를 취하지 않는 고전적 형태의 지적 자산에 대해서도 콘텐츠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그것이 디지털 매체에 담을 대상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근 인문계 연구자들의 학회 조직을 통해 제안된 “인문 콘텐츠”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한국에서 쓰이는 “콘텐츠”라는 용어의 개념은 그 외연이 아무리 확대되었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정보 시스템” (Information Systems)이라고 하는 플렛폼을 매개로 하여 유통되는 내용물을 의미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인문 콘텐츠의 의미는 일단 “정보 시스템이라고 플렛폼에 담겨서 유통되는 인문 지식”이라고 정의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면 정보 시스템에 담기는 인문 지식, 다시 말해 인문 콘텐츠는 전통적인 인문학에서 추구해 온 인문 지식의 내용과 다른 것인가?  질문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그 대답은 “그렇다”일 수도 있고 “아니다”일 수도 있다. “그렇다”는 대답은 아마도 “21세기 정보 기술 시대의 인문학이 다루는 주제가 과거의 고전적인 인문과학이 다루던 것들과 같을 수만은 없다”는 뜻에서 나온 대답일 것이다. 필자 또한 인문학의 주제는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달라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유의 변화는 과거에도 끊임없이 있어 온 것이며 오늘날에만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정보 시대를 맞아 인문학의 내용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는 인문학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디지털 시대의 변화된 요구에 따라 새로운 주제에 대해 탐구하는 인문학, 그 학문의 내용은 여전히 “인문 지식”일 뿐, “인문 콘텐츠”라고 바꾸어 부를 이유가 없다. “인문 콘텐츠”는 과거의 전통적인 인문 지식일 수도 있고 오늘날의 새로운 인문학적 연구 성과물일 수도 있다. 다만 “인문 지식”을 “인문 콘텐츠”라고 부를 때  그것이 의도하는 것은 그 내용물이 담길 매체가 전자적 환경에서 운영되는 “정보 시스템”이라고 하는 것이다.



  3. 지식 정보 유통의 두 가지 길


  “인문 지식”이라고 하는 내용물을 “정보 시스템”이라고 하는 매체에 담는 일의 목적과 필요성은 무엇인가?  “인문 콘텐츠”의 이름으로 이루지는 일이 기본적으로 “내용”을 “매체”에 담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은 전통적인 저작물의 간행이 의도했던 바에서 유추해 보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인문 지식의 저작물”이라고 하면 오늘날까지 학자들이 그들의 연구 성과물로서 생산해 낸 “논문”과 “저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저작물은 대부분 종이를 매체로 하는 도서 출판물의 형태로 공표되었으며, 현실 세계라는 공간에서 출판물의 유통을 통해 그 속에 담긴 지식의 전파가 이루어져 왔다.

   전통적인 지식 유통 수단이었던 출판물 간행의 동인은 무엇인가? 연구자인 저자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연구 성과를 타인에게 공표함으로써  그것을 여러 사람이 공유할 있게 한다는 의미가 중요하다. 그런데 출판물의 간행은 연구자 개인의 노력과 투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출판사의 힘을 빌어 도서 저작물을 간행하는 경우, 출판사업자의 입장에서도 그 일을 해야 할 목적과 필요성이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그 저작물이 상품으로서 가치를 지녀 판매를 통한 이윤 추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양자의 이해가 합치될 때 이른 바 지식 상품의 생산․보급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연구자들의 모든 연구 성과가 출판물로 간행되었을 때 상업적 이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영리적 유통 체계에 들어갈 수 없는 전문 지식은 연구자들이 스스로 운영하는 비영리적 지식 유통 체계를 통해 그들 전문가들 사이에서 공유된다. 학회와 같은 전문가 그룹에서 간행하는 학술지는 후자에 속하는 출판물이다.

  연구 성과를 간행하는 이 두 가지 길은 저마다의 유효성을 지니고 있다. 상업적 유통 체계는 지식의 사회화 및 사회적 지식 수요 증대 효과를 유발하고, 비영리적 지식 유통 체계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보다 심화된 지식의 재생산을 가능케 한다. 지식 자원의 전자적 유통에도 이 두 가지 체계가 존재한다. 연구 성과의 전자적 간행에도 대중적 수요를 겨냥한 문화 콘텐츠의 생산과 보다 심화된 연구 개발을 촉진하는 전자적 연구 교류의 두 가지 길이 있는 것이다.



4. 문화 콘텐츠 vs 인문 콘텐츠


  필자는 이 시점에서 “문화 콘텐츠”와 “인문 콘텐츠”라고 하는 두 가지 용어의 개념을 비교하고자 한다. 문화 콘텐츠라고 하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널리 유행하고 있는 말이며, 그것은 주로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 게임, 케릭터 등과 같이 상업적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저작물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인문 콘텐츠는 그와 같은 문화 콘텐츠 중에서도 인문 지식을 소재로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만일 인문 콘텐츠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만 정의한다면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전자적 지식 유통 체계 중 영리적인 것에만 관계하는 것이 된다. 인문과학 연구자들이 그들의 전문 지식을 전자적으로 소통하기 위해 생산해 내는 비영리적 디지털 저작물은 인문 콘텐츠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할까?

  “문화 콘텐츠”와 “인문 콘텐츠”의 차이는 그것이 다루는 소재의 다름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 콘텐츠”는 그 내용적 소재가 무엇이건 간에 산출물의 용처가 “문화적”인 데 있다는 의미가 강하다. 문화 콘텐츠 진흥론이 주창될 때 세계의 대표적 문화 콘텐츠로 지목되었던 스필버그의 영화 “쥐라기 공원”의 학술적 배경은 생명과학과 고생물학이다. 미국 EA(Electronic Arts) 사의 성공적인 컴퓨터 게임 “FIFA”, “NBA” 시리즈 등의 지식 기반은 스포츠이며, 일본 코에이[光榮]사의 게임 소프트웨어 “칭기스칸”, “삼국지” 등은 세계문화사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음악, 미술과 같은 전통적 문화 영역뿐 아니라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을 두루 포섭하는 저작물들을 문화 콘텐츠라고 이름하는 이유는 그 소재가 문화적인 데 있다기보다 그 생산품이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문화 영역인 “엔터테인먼트”의 수요를 겨냥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 콘텐츠가 그처럼 목표 지향적인 개념이라고 한다면, 인문 콘텐츠는 소재 지향적인 개념으로 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목표가 상업적인 문화 상품의 개발에 있든, 전문적 연구 활동의 활성화에 있든,  인문 지식을 소재로 그것의 전자적 소통을 위해 이루어지는 일은 인문 콘텐츠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5. 우리나라 콘텐츠 육성 사업의 편향성


  필자가 굳이 문화 콘텐츠와 인문 콘텐츠를 구분하려는 이유는 양자를 동일시하거나 후자가 전자에 포섭되는 것으로만 이해할 경우 인문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인문 분야의 지식 정보 활동이 대중적 문화 상품의 제작 쪽으로만 편향되는 우를 범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 부처에서 주도하고 있는 문화 콘텐츠 산업 육성 사업은 “문화 콘텐츠 수출 산업화 및 세계 5대 문화 콘텐츠 산업국 진입”을 목표로 2천2백억 규모의 기금을 운영하며 영화 게임 등의 영리적 콘텐츠 및 그러한 문화 상품의 생산에 바로 연결될 수 있는 반제품적 지식 콘텐츠의  생산을 지원하고 있다.3) 이러한 목적의 사업이  단기간에 영리적 유통 체계에 들어갈 수 있는 분야의 한정된 자원만을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 과학 분야에서도 그러한 방향의 사업에 참여하여 지식의 대중화를 이루고 고급 지식에 대한 사회적 수요의 창출하는 선순환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지식 정보의 연구 개발 인프라가 미처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계 활용이 불가능한 고립적 단품 저작물의 생산만을 추구하게 되면 투자 규모를 아무리 증대해 간다고 해도 그 산출물의 질과 생산성 면에서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투자에 비해 얻는 것이 미미한 고비용 저효율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부 주도의 또 다른 콘텐츠 개발 지원 사업인 “지식 정보 자원 관리 사업”은 “국가적으로 보존가치가 높거나 활용가치가 큰 지식정보 자원을 디지털화하여 인터넷을 통해 대국민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기치 아래 비영리적 지식 콘텐츠의 개발을 지원하고 있으나4) 이 사업 또한 지식 생산자(연구자) 상호간의 전자적 지식 정보 유통을 위한 노력을 도외시한 체, 기생산된  자원을 디지털 정보를 가공, 유통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기초 지식의 전자정보화, 디지털 지식 자원의 연계 활용을 촉진하는 기반 연구는 여전히 부재한 상황이다.



6.  비영리적 e-R&D 환경 구축의 필요성


  오늘날과 같이 지식 유통의 디지털 매체에 대한 의존도가 나날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인문 지식의 연구 행태는 여전히 과거의 수준에 머물게 한 채  그 성과물만을 디지털화 하려 한다면 이른바 연구 활동 따로 정보화 사업 따로의 모습이 될 것이 자명하며  여기에서 산출되는 지식 정보는 언제까지나 초보적인 안내 정보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인문 콘텐츠라는 이름으로 인문 지식의 전자정보화와 이를 통한 인문지식의 사회적 확산을 목표로 하는 인문계 연구자들이 인문학 분야의 연구 활동 자체를 전자적 정보 활동 체계 속에 진입시키는 일에 관심을 가질 필요성은 바로 이 점에서 제기된다.

  연구 성과물을 정보화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구 활동 그 자체를 정보 시스템 안에서 수행하는 것을 e-R&D(electronic Research & Development), 전자적 연구 개발이라고 한다. e-R&D는 인문학 분야에서는 아직 생소한 용어이지만 자연과학 분야에는 분과 과학(Domain Science)과 정보학(Inforamtics)의 밀접한 결합을 통해 학문적 연구 활동을 실험실이 아닌 컴퓨터와 정보 네트워크 상에서 수행하는 일이 가속화되고 있다. 컴퓨터의 고속 연산 기능을 이용하여 인간 유전체의 데이터를 해석하고 응용 분야를 넓혀 가는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 신약의 선도물질(Lead compounds)을 찾아내고 최적화하는 과정을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룰 수 있도록 여러 가지의 자료를 정보화하고 지식으로 변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화학정보학(Cheminformatics) 등이 그 예이다.

  생물학이나 화학과 같은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 활동은 실험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컴퓨터로 하여금 모의 실험 기능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e-R&D 활동을 할 수 있지만, 문헌 연구와 비판적 사유에 의존하는 인문학에서 전자적 연구 활동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위해 최근에 간행된 “표점 교열 원전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5)의 한 가지 기능을 설명하고자 한다. 필자는 1995년 국역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간행직후, 그 후속 사업으로 기획된 원전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의 전자적 자료 구조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단순한 참고 자료로 쓰이기보다 학자들의 연구활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실험실적 기능을 수행 할 수 있도록 문헌 자료 속의 지식 요소들을 논리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실록의 모든 기사 속에서 인명, 지명, 서명, 연호를 기계적으로 식별해 낼 수 있는 마크업 기호를 삽입토록 하였으며, 특히 인명 및 지명에 대해서는 일본과 몽고․만주 등 외국의 고유명사를 구별할 수 있는 속성을 부가하도록 하였다. XML 언어로 일관되게 기술된 실록 데이터베이스 정보가 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는 응용 프로그램과 결합하게 되면, “일본의 외교 사절을 응대한 우리나라 관료들의 이름과 일본에 대한 그들의 언행을 모두 추출”하여 정리하는 정도의 작업은 충분히 기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기계적인 작업의 결과가 그 자체로 연구 성과가 되는 것은 아니며, 산출된 자료를 검증하고 연구 목적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이론을 구성해 내는 것은 연구자들의 지적 능력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 자료를 담고 있는 정보 시스템이 이 정도의 기능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연구 생산성은 크게 신장될 수 있을 것이다.

   실록과 같은 방대한 규모의 문헌을 전산화하는 사업이 아니라도 우리나라의 많은 인문학 연구자들이 각자의 필요성에 의해 여러 가지 문헌 자료나 영상, 음성 자료, 자기 분야의 최신 연구 성과 목록들을 디지털화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필자가 인문학의 e-R&D 환경 구축이라고 하는 과제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인문 연구 자료를 정보화 하는 모든 개별 사업들이 일정하게 준용할 수 있는 “정보 기술(記述) 규칙”을 제정함으로써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보 자원들이 필요한 시점에 언제라도 상호 연계하여 활용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유관한 자료들을 모두 한 군데 모아 종합적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은 막대한 재원이 소요될 뿐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그 망라성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에서 오늘날의 정보과학은 집중형이 아닌 분산형의 정보 시스템을 추구한다.  즉 개별 기관이나 개별 연구자들이기 각각 자신의 전문 분야 지식을 담고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되, 그 각각의 독립적인 시스템 안에 어떠한 정보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는 정보가 공유됨으로써 유관한 정보 자원을 언제든지 종합적으로 획득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분산된 이종(異種) 시스템의 자원들이 상호 연계하여 활용되는 것을  상호운영성(相互運營性, interoperability)6)이라고 한다. 지식 정보 자원의 상호운영성은 데이터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만으로 저절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지식 영역의 정보 자원이 갖는 특성을 충분히 반영한 표준적인 정보 기술 규칙이 사전에 확립되어 있어야 하고 개별 정보 자원들은 그러한 기술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생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분산된 지식 정보 자원의 상호운영성을 위한 기술적 요소들은 정보과학 분야에서 심도 있게 연구되어 여러 가지 유용한 방법이 제안되고 있지만, 그것을 활용하여 실제적인 e-R&D 환경 구축하는 일은 정보과학이 아닌 분과 과학의 영역에서 그 학문의 특성에 맞게 영역별로 이루여진다고 보아야 한다. 생명과학, 우주과학, 환경공학 등 분과 과학의 지식 자원은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단계에서는 이들 분과 과학의 영역 내에서 분산된 정보 자원의 연계 활용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정보과학은 방법론을 제공할 뿐이고 그것을 응용한 e-R&D 환경 구축은 분과 과학이 그 주체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인문과학도 이 점에서 예외일 수 없다.

  인문 지식 자원의 전자적 상호운영성 확보를 위한 노력은 인문과학의 연구 생산성 향상을 위해 인문계 연구자들 스스로가 해야할 일이며, 당장은 상업적 이윤 창출과는 무관한 비영리적 연구 활동의 일환으로 수행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인문 지식의 e-R&D 환경 확산을 통해 기초 지식 자원부터 상호운영성을 갖춘 디지털 자원으로 구축되어 갈 때, 머지 않은 장래에 그 자원의 결합과 응용에 의한 고부가가치 정보 상품의 개발도 가능해질 것이다.



7. 맺음말: 인문정보학 연구를 위한 제언


   인문과학 분야의 학술적 연구 활동을 전자적인 체계 안에서 수행하는 일, 바꿔 말해 비영리적 인문 콘텐츠를 생산하여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 상호 소통되게 함으로써 연구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문화상품적 콘텐츠의 개발까지도 촉진시키는 연구를 필자는 “인문정보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 인문정보학이란 생물정보학이나 화학정보학처럼 분과 과학(Domain Science)과 정보학(Informatics)을 융합한 학제적 연구활동을 지칭한다.

   인문정보학의 구체적인 내용은 문학, 사학, 철학 등 인문학 내의 분과  영역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일반화시키기 어려우나 몇 가지 기본 연구 활동을 든다면,  유형화 시킬 수 있는 인문 지식 자원의 표준적인 메타 데이터(Meta Data) 형식 개발, 다양한 종류의 메타 데이터를 상호 연계 할 수 있도록 메타 데이터 관련 정보의 공유 기반을 제공하는 메타 데이터 레지스트리의(Mata Data Registry) 운영, 인문 분야의 언어 자원에 기계적 가독성을 부여하기 위한 마크업(Mark-up) 체계 개발 및 적용, 축적된 지식 자원에 대해 기계적인 질의 응답 기능을 구현하는 데 적합한 데이터 모델(Data Model) 개발 등을 들 수 있다.

  지식의 전자적 상호 운영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술적 요소들은 이미 정보학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해서 심도 있게 연구되고 또 어느 정도 국제적인 표준화 작업까지도 이루어진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과학적 기술 요소들을 인문 지식에 적용하여 인문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인문 지식에 정통한 인문학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그 일은 단순히 확정된 정보 기술을 인문 지식에 도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인문 지식의 내용과 특성에 따라 적용할 기술을 변경하고 발전시키는 노력을 수반해야 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누가 할 수 있는가? 문학, 역사 철학 등 전통적인 인문 분야 분과 학문과  정보 처리 기술을 다루는 정보 과학 양 분야에 걸쳐 정통한 지식과 경험을 보유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 한 두 사람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개별 분과 학문의 다양한 전문 지식을 배경으로 하면서 정보 기술에 관한 공동의 이해 기반을 형성한 다수의 연구자들이 긴밀한 의사소통과 공동 작업을 수행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과제의 수행을 위해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는 인문콘텐츠 학회 내에 “인문정보학연구회”라는 이름의 분과 연구 모임을 조직할 것을 제안한다. 인문학과 정보학은 아직까지 학제적인 연구 활동을 촉진할 계기가 마련되지 않았던 탓에 정보학적 지식을 겸비한 인문학자의 수가 극소할 뿐 아니라 인문학에 조예를 가진 정보 전문가도 찾아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출발이 있기 마련이다. 인문정보학연구회의 초기 활동은 인문학과 정보학 양 분야의 전문가들이 서로에게 자기 분야의 연구 목표와 내용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기회를 마련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결실은 서로 다른 언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공통 어휘가 없는 양 분야의 학술적 술어들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첫발을 내디딘 후에는 양 분야의 상호 이해에서 오는 시너지 효과가 그 학제적 연구를 가속화하여 짧은 기간 안에 인문 지식의 정보화에 관한 기반 지식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7)

  이 연구 모임은 인문과학과 정보과학 양 분야 연구자들의 공동 참여가 필수적이다. 인문계 연구자들의 정보 기술에 대한 관심은 인문콘텐츠학회의 설립을 통해 그 단서가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정보과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인문 콘텐트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어떻게 마련하느냐 하는 것이다.

  인문과학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바람직한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해 온 학문이다. 인류의 역사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때마다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원리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하는 문화적 성찰과 새로운 가치관이 확립이 요구되었으며 그러한 요청에 부응하는 역할을 인문 분야의 제학문이 담당하여 왔다.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인문학 연구의 자원과 연구성과들이 디지털 신호로 구축되는 사이버 세계에서 외면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정보과학의 관심사에서도 동떨어진 일이 아니다. 인문학자들이 종래의 자족적 연구 자세에서 벗어나 정보과학의 성과를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고 정보 전문가를 적극적으로 인문과학의 연구 현장에 초청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인문정보학은 정보과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연구 과제로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정보시스템부장


2)  이와 같은 의미의 “콘텐츠”는 정보 기술(Information Technology) 분야에서 사용되어 온 “콘텐트”(content)라는 말과 비교해 볼 때 그 함의에 있어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또한 외국에서 이 단어에 대해 우리와 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사례를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콘텐츠”는 현대 한국 사회의 특수한 상황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용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3) “2002년 문화산업 백서”, 문화관광부 문화콘텐츠진흥과 정책 자료


4) “2002년 지식정보자원관리 시행 계획”, 정보통신부 정보화기획실 정책 자료


5) “標點․校閱 原典朝鮮王朝實錄”은 1995년 국사편찬위원회와 서울시스템(주)의 협력 사업으로 착수되어 2003년 4월에 CD-ROM 및 온라인 데이터베이스 간행되었다.


6) 상호운영성:  각기 다른 기계 장치가 동일한 조작 방식에 의해 운전될 수 있음을 말한다.  정보학에서는 정보 자원이 상이한 정보 시스템 사이에서 서로 소통될 수 있음을 의미.


7) 인문정보학연구회의 활동은 인문학과 정보학의 상호 이해를 모색하는 데서 출발하되, 연구 활동이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면 인문 지식 자원의 내용에 적합한 디지털 콘텐츠 생산 기술의 연구 및 표준 규약 제정을 통한 기술 확산을 주요 임무로 삼게 될 것이다.